
kotodama
상려 / 하루카, 미나미 위주 ŹOOĻ
1
이스미 씨, 오셨나요. 네. 두 분은 아직이세요. 물 드릴까요? 더워 보이시네요. 습기 때문일까요.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이라던데. ……호오. 요 앞에서 수상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고요. 무슨 일이었을까요. 이스미 씨는 아직 유괴를 당할 연령이었던가요?
'계세요?'라고 물었다고요. 그래서 대답하셨나요? ……그렇군요…….
글쎄요. 이스미 씨는 기가 허한 편은 아닌데, '그런 것'이 종종 따라붙는 편이죠. 잠깐…. 멀어지지 말아주실래요? 저한테 보인다는 말이 아니니까. 그래요. 그런…, 점괘예요.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무서워하는 마음을 들킬수록 그것들은 더 재미있어한다고 하잖아요. —아, 물음과 대답 이야기 말이죠.
언령言霊에 대해서는 잘 아시나요?
그러니까…. 이스미 하루카 씨. (……? 으응?) 제 더위 사세요. (…? ……?) 후후. 어리둥절한 얼굴이네요.
맞아요. 그 '더위팔기'랍니다.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서, 상대방이 무심코 대답하면 더위를 팔 수 있다.>는. 아,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런 풍습의 기원에도 '말에는 힘이 담겨있다'는 주술적인 인식이 있단 걸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스미 씨가 그 언령에 걸렸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라는 건 농담.
——미도 씨, 어서 오세요. 오늘은 웬일로 꼴찌가 아니시네요.
2
이스미 하루카가 최근 들어 세 번이나 전화번호를 바꾼 일은 주변에서 소소한 이야깃거리였다. 이스미 군 또 번호 바꿨던데. / 극성 스토커라도 붙은 걸까요? / 그런 거라면 큰일이네….
"장난전화가 걸려왔어."
처음 이스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멤버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 동급생의 연락이 아니라? 불우하군.", "이번 버라이어티 괴담 소재로 써도 될까요?" 따위의 반응만 보아도 그러했다. 토우마만이 어디서 스팸 전화 수법 같은 걸 검색해와 귀띔해주었을 뿐이다. (하루카 "그런 게 아니었다니깐. 토우마나 낚이지 마!")
그러는 사이 나날이 하루카의 안색이 나빠져 갔다. 이동 차량이나 대기실에서 구겨져 잠을 자는 빈도가 잦아졌다. 넌지시 떠봐도 잠을 설쳤다는 대답만 돌아오자, 세 사람은 작심하고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그제야 하루카는 전에 지나가듯 토로한 '장난전화'가 원인임을 털어놓았다.
발신번호 표시제한의 전화는 주로 한밤중에, 가끔 종잡을 수 없는 때에 걸려온다고 했다. 잠들어 있을 때도, 깨어 있을 때도 잊을 만하면 벨소리가 울린다고. 수화기 너머 상대방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하루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볼륨을 최대로 키우고 귀에 붙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적인 음량이 튀어나왔다. 테이프를 거꾸로 감는 듯 빠른 말소리라고 했다. 그 당시를 떠올리는 하루카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질색했다.
한 번은 ŹOOĻ 대기실에서 그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하루카가 대답하자마자 커다랗고 기이한 음절이 쏟아져나왔다. 깜짝 놀란 하루카가 소파에 핸드폰을 내던지자 적막한 대기실에 온통 기괴한 음성이 뻗어나갔다. 하루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귀를 막을 손끝도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그 꼴을 본 토우마가 핸드폰을 들어 얼른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세 사람 모두 할 말을 잃고 토우마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다시 벨소리가 울릴 것 같아서였다. 하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며칠은 지나야 다시 걸려올 거야."
침묵이 가시자 대기실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미나미가 녹음할 생각을 해야지 끄면 어떡하냐고 토우마를 닦달했다. ("아니, 하지만 하루가 너무 무서워하니까….", "이스미 씨. 다음번에는 겁이 나도 꼭 녹음을 하도록 하세요.") 토라오도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며 츠쿠모에 경찰 조사 의뢰와 새 유심칩을 요구하라고 했다("이런 일을 왜 참고 있지?").
미나미는 토우마에게 또 전화가 오면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3
어린 나츠메 미나미가 일찍이 깨달은 사실이 있다. 욕망의 밀도는 스포트라이트의 강렬함과 비례한다. 요구가 다양해질수록 욕망도 다각적이어졌다. '아무리 어려도 프로라면 예의를 차려야지', '어린애가 너무 어른스러워 걱정스럽다', '아역인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위화감이 든다' 따위의 말이 아직 무른 미나미를 여러 각도로 기울이고 꼬았다.
지나치게 이른 깨달음을 모면하기 위해 미나미는 다양한 케어를 받았다. 정신감정, 음악치료, 놀이치료……. 한 번은 업계인이 모친에게 용한 역술인을 주선해 주었다. 미나미를 향하는 악한 기운을 우회시켜 준다는 거였다. 긴 백발을 틀어올린 역술인은 인상 좋고 평범한 할머니처럼 보였다. 조금 특이했지만 별것 아닌 말로 상대방을 웃기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친구가 많아 사무실에도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들은 어린 미나미에게 액막이 부적이며 재물운 인형 같은 것들을 선물해주곤 했는데 효과가 있거나 없거나 했다. 미나미는 그들이 자신에게 딱히 원하는 게 없어 보인다는 점이 좋았다.
언령사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언령', '언령사'. 미나미가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는 한여름이었는데도 가슴께까지 기른 검은 직모를 묶지 않았다. 군데군데 새치가 섞여 있는 것치고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대화를 주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분위기를 이끌어간다는 인상을 주었다. 어떤 말에는 힘이 있다. 미나미가 보기에, 언령사란 바로 그 말들을 사용할 적재적소를 포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언령사에게 들어오는 의뢰란 주로 타인에게 저주를 거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쿠라 하루키에게 이 얘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하루키는 미나미의 경험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어서 점괘니 혼령이니 하는 것을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분야를 찾는 것이 더 힘들리라. 하루키는 언령사에 관한 이야기를 특히 흥미롭게 캐묻더니 문득 말했다.
"내 노래에도 언령이 담긴다면 좋겠네."
"무슨 언령이요?"
"'행복해져라'"
미나미는 지극히 하루키다운 언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언젠가 만들어낼 자신의 노래에는 어떤 언령이 담길까?
4
매일 저녁 라디오에 장마전선의 일거수일투족이 송출되던 시기였다. 미나미는 낮게 우르릉대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머리맡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이스미 씨'. 4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미나미는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나츠메입니다."
에어컨 바람이 으슬으슬했다. 미나미는 얇디얇은 여름 이불을 돌돌 말았다.
"미, 미안. 자고 있었어? 그게, '전화'가……."
'전화'? 미나미는 방금 잠에서 깨서 멍한 머리로 '이스미 하루카'와 '전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고민했다.
"아."
깨달은 미나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하루카의 숨소리는 겁에 질린 기색을 겨우 감추는 듯했다.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 반이다. 네 시 반! 지금까지 이런 초새벽에 그토록 몸서리쳐지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건가. 하루카는 잠이 많다. 겁도 많다. 미나미는 그가 근래 부쩍 피곤해하던 모습을 대번에 납득했다. 납득했다 뿐인가. 진작에 새벽녘에 울며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녹음은 하셨나요?"
"응. 들어보진 않았는데…."
정확히는 '차마 혼자 들어볼 자신은 없었다'겠죠. 굳이 꼬집는 건 가혹하게 느껴져 미나미가 최대한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파일은 나중에 보내 주셔도 되니 일단 다시 주무세요. 믿을만한 사람에게 물어볼 테니."
- 믿을만한 사람?
"그런 게 있어요."
- 미나미의 연줄은 종잡을 수 없네…. 그, 그런데 미나미.
"네."
- 그…. 아…. 그렇지! 내일 집합 몇 시까지더라!?
미나미는 잠시 침묵했다. 이상한 일이다.
일단 하루카는 남에게 뭘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모르는 게 생기면 바로 옆 사람한테 '그거 뭐였지?' 하고 묻는 토라오-토우마와 달리, 하루카는 공지사항이나 검색엔진을 먼저 켜는 타입이다. 그러므로 단체 래빗챗 공지에 떡하니 걸려 있는 집합시간을 굳이 자신에게 물어보는 상황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미나미는 알았다. 필시 하루카는 이 전화를 끊고서 찾아올 적막이 두려운 것이다.
"……9시 30분이에요."
- 아…. 그랬지!
하루카는 입을 다물었다. 평소 잡담을 위해 전화를 거는 일이라곤 없었던 두 사람인 만큼,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루카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그럼…. 늦은 시간에 미안했어.
"아, 이스미 씨."
- 어?
그런 하루카를 미나미가 붙들자, 하루카의 대답에서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미나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용건이었다.
"전에 말씀하셨던 소셜 게임 말인데요. 아무리 찾아봐도 뭔지 기억이 안 나서."
- 으, 응? 갑자기? …<캔디런>?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이 새벽에 게임 이름이나 묻는데도 하루카는 짜증내는 대신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미나미는 그다지 연속성 없고 중요하지 않은 용건을 몇 개 더 꺼내어 하루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하루카의 말투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섞이기 시작하자 미나미는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그럼, 스케줄 때 뵙겠습니다. 안녕히."
- 어? 어어. 미나미도 잘 자.
5
하루카가 녹음 파일을 보내왔다.
미나미는 아역 시절 방문했던 역술인을 수소문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세상을 떴다고 했다. 대신 연락이 닿은 것이 그때 만난 언령사였다. 언령사는 하루카의 녹음을 듣자마자 '뭐야? 이 엉터리 저주 흉내는.' 하고 진력냈다. 단순한 역재생이라고, 그런 걸로 저주가 걸린다면 언령사는 전부 영업을 접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미나미는 그것이 어떠한 영적인 현상도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 대신 난감함을 느꼈다. 이스미 하루카에게 향하는 악의가 온전히 인간의 것이라니?
미나미는 납득하지 못한 채 하루카에게 언령사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 통화는 언령도 저주도 아니었어요.' 미나미와 달리 하루카는 안도한 기색이었다! '경찰 조사만 기다리면 되겠네.' 미나미는 그에게 동조하려 애쓰며 생각했다. '이쪽이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불가해한 기현상보다는 그래도 이성의 범주인 인간의 악의 쪽이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째서 그토록 비합리적인 가능성을 먼저 떠올려버렸나.
어쩌면 미나미는 하루카에게 그만큼의 악의가 향할 리 없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루카는 거칠고 난폭한 갱스터를 표방하지만, 콘셉트야 어쨌건 본체는 17세 고등학생이다. 동급생인 누구와 달리 체격도 아담한 편이다. 종종 귀염성 있는 표정을 짓는다. 덕분에 팬들이 '하루카 군, 귀여워~!' 하고 꺅꺅대면 본인은 당황하는 광경을 숱하게 본다. 그런 이스미 하루카는 '무고'하고 '무해'한 사람 이니까. 차라리 합리성이 배제된 영적 연원이 합리적이어 보였던 거다.
'저는 이스미 씨에게 누굴 비춰 보고 있었던 걸까요.'
너무 많은 방향에서 바람欲望이 몰아치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풍선 인형처럼 속절없이 흔들렸다. 뭔가 하면 숨을 틀어막는 맞바람이 닥쳐왔다. '그 불합리함을 이스미 씨에게 쏟아진 일련의 악의에 투영했다?' 미나미는 조금 당황했다. 이래서야 마치…. 대상을 멋대로 결백한 자리에 올려놓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하루카를 향한 악의가 비합리적인 힘이기를 바라는 자신이 있었다. 미나미는 그 부분을 잠시 외면하기로 했다.
6
며칠 후, 하루카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오던 범인이 잡혔다. 정확히는 범인'들'이었다.
하루카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온 것은 전부 다른 사람들이었다. 성별도 연령대도 일정하지 않았다. SNS에 하루카를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게시한 이력도 확인되었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미심쩍어하며 추가 조사에 들어갔다.
"악질이군."
"잡혀서 다행이야!"
토우마가 부러 밝은 어조로 말했다. 하루카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이나 정성을 들여 타인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니. 그야 아이돌이라면 팬도 안티도 있는 것이 불가피하다지만, ŹOOĻ로 데뷔하고서 이렇게 구체적인 실체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미나미는 경찰이 차라리 스토커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지극히 인간적이고 구체적인 실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토라오가 문득 물었다.
"번호는 어떻게 안 거지?"
"본인들도 기억이 안 난대."
"이상하군."
"이상하네요."
네 사람은 그들이 시치미를 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무슨 발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불길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는 사실에 후련함을 느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7
대기실에서의 사건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일어났다.
전날 밤늦게까지 가족행사에 참석했다는 토라오는 소파 하나를 차지한 채 잠들어 버렸다. 토우마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쇼핑몰을 둘러보고 있었고, 하루카는 그 소파 끄트머리에 책상다리로 파묻혀 게임 스코어 갱신에 골몰하고 있었다. 미나미는 화장대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쓴 채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나미가 이변을 감지한 것은 화장대 거울에 비친 하루카가 벌떡 일어서는 모습을 발견한 뒤였다. 미나미가 헤드셋을 벗자마자 차단되어 있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토, 토우마가 먼저 '난폭하게 날뛰자~' 부분 몇 번이나 흥얼거렸잖아!"
"무슨 소리야? 하루가 갑자기 '비명 지르는 녀석들이 있어도~' 이러고 노래 불렀잖아!?"
"아니!! 그, 그렇지. 미나미지? 미나미가 <Poisonous Ganster> 흥얼거렸지!?"
하루카의 지명에 미나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왜들 소란이야." 토라오가 얼굴에 덮었던 잡지를 치우며 하품했다. 잠을 방해받아 성가신 기색이 엿보였다.
"토우마가 무서운 장난 치잖아!"
"아니, 정말로 나는……."
하루카에 이어 토우마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쾅! 미나미가 화장대 서랍을 난폭하게 닫는 소리였다. 미나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를 낮춰주세요. 옆 대기실에 폐가 되니까요."
"……."
"……."
"자, 이누마루 씨부터 설명해주시겠어요?"
"…그게…."
토우마의 주장에 의하면 하루카가 갑자기 <Poiosonous Gangster>의 한 소절을 불렀다. 뜬금없다고 생각해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는데, 하루카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더라는 거였다. (이 부분에서 하루카는 소름 돋은 팔을 마구 문질렀다.) 하루카는 하루카대로, 대기실 안 누군가가 갑자기 그 직전 마디를 불렀다고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회답해주길 바라는 듯이! 그러기에 자신이 그 뒷부분을 받아 흥얼거린 것 뿐인데, 토우마가 비웃으며(토우마 "비웃진 않았다만!?") 자신을 쳐다보더라는 거였다. 토우마는 하루카가 흥얼거리기 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토라오는 자느라, 미나미는 헤드셋을 끼고 있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미나미가 가볍게 던졌다.
"미도 씨가 코 고는 소리를 잘못 들었다거나."
"그럴 리 없잖아!"
"난 코 안 골아."
"토라, 피곤할 때 살짝 골거든?"
토우마의 일침에 토라오가 마뜩잖은 시선을 보냈다. 뒤늦게 무마하는 토우마는 어느새 방금 전의 일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하루카는 여전히 얼음이었다. 미나미는 곰곰이 생각했다. 질문과 대답. 선창과 후창.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유난히 지겹게 끄는 올해 장마처럼.
8
- 안 되지. 낯선 것에 대답하면.
언령사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일련의 일화를 전한 직후였다. 미나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번엔 저주도 뭣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그는 미나미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수화기 너머로 한숨을 쉬었다.
- 그건 정말로 조잡한 흉내에 불과했어.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서 왔냐는 거다.
"어떻게 떨쳐낼 수 있죠?"
- 이쪽은 내 전문이 아냐. 일단 그 녀석이 아무거에나 화답하지 못하도록 전해 둬.
그러고 보니 모든 사건은 그날을 기점으로 일어나지 않았던가. 하루카가 시답잖은 질문에 대답해버린 날. 올해 장마가 시작되던 그날…. 미나미는 반 농담으로 하루카 앞에서 언령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해버린 일을 후회했다. 신경줄 두꺼운 토우마나 토라오는 몰라도, 하루카는 그런 일을 그냥 넘겨버리기에 너무 섬세했다. 그런 점이 연쇄 반응을 불러온 건지도 몰랐다.
- 너무 걱정은 마라. 집요한 저주는 아냐. 무던히 흘러가도록 도와줘.
"알겠습니다…."
미나미는 한숨처럼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9
뭐야. 미나미, 와 있었어? 정말 매번 빠르다니깐. 나도 일찍 온다고 일찍 온 건데. ……. 오랜만이네. 둘이서만 스케줄 잡히는 거. ……. 뭐, 여기 스튜디오는 나쁘지 않아. 소파가 푹신해서 마음에 들어. …하? '하나 사드릴까요?'라니. 토라오가 여자 꼬실 때나 꺼낼 법한 말을 하고, 뭐야. 알았다. 애 취급 하는 거지!
아…. 피곤해 보인다고? 뭐어. 확실히 컨디션이 최상까진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냐. 프로니까, 이 정도는 녹음 퀄리티에 아~무런 영향도 못 준다고.
오늘? 딱히 별일…. 으음. 그렇게 콕 찝어 말하니까 기억나는 게 있긴 하지만. …미나미, 오늘따라 집요해! 아니, 진짜 별거 아녔다니깐? "하루카 군"이라고 불려서, "네?" 하고 대답한 것 뿐이야. 돌아봤더니 아무도 없어서 머쓱하긴 했는데.
뭐, 뭐야.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어?
…….
잠, 뭐야. 그 명령조. 납득할 수 없다구. 갑자기 모르는 사람한텐 일절 대답하지 말라니…. 하아? 후회할지도 몰라? 지금 협박하는 거? 그러니까, 어째서냐니까! ……. 갑자기 입을 닫아버려도…. …나 참. 알겠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거지? 노력은 해 볼게. 나중엔 꼭 말해줘야 해….
하지만, 부름을 받으면 보통 대답을 돌려주고 싶어지잖아?
10
세 사람은 앵콜 중간부터 하루카의 이상을 눈치챘다. 라이브의 열기로 말미암지 않은 식은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성량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떨어져 급하게 음향이 조정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앵콜의 열광으로 포장되리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런 사실이었다. 하루카의 시야에 흔들리는 팬라이트의 물결이 뭉개져 보였다. 그가 눈을 부릅뜨자 그 까닭을 알 리 없는 관객의 함성이 덩달아 커졌다.
"하루카 군!"
"하루카—!"
환희에 찬 연녹색 사이리움이 하루카의 이름을 불렀다. 하루카는 전력을 다해 노래를 토해내는 것으로 그에 응답했다. '미나미의 노래, 한 번이라도 무성의하게 부르는 것은 싫어.' 하루카는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은 마이크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여기서 쓰러지지 않겠어. 끝까지 우리를 새겨넣어 주겠어…!'
"이스미 씨!"
하루카는 무대 뒤로 돌자마자 휘청거렸다. 바로 뒤에서 걸어가던 미나미가 얼떨결에 그를 받아냈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심각했다. 닿은 곳마다 델 것처럼 뜨거운 열이 전해졌다.
'이런 몸으로….'
미나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스미 씨, 걸을 수 있겠어요?" 하루카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토라오와 토우마가 양쪽에서 하루카를 부축했다. "구급차!" 토우마는 아연한 스태프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길을 텄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풀썩 하루카의 무릎이 꺾였다. 눈꺼풀도 가물가물하게 닫혀가고 있었다. 토라오가 "젠장!" 하고 초조하게 내질렀다. 그는 하루카의 팔 한 쪽을 토우마에게 넘긴 다음, 그 앞에 등을 보이고 돌아 앉았다.
"업겠어."
하루카는 그 몸상태를 하고도 인상을 쓰며 잠깐 버텼으나 금방 힘이 빠져버렸다. 그는 미나미와 토우마가 넘겨주는 대로 토라오의 등에 얹혔다. 토라오는 서투른 손길로 하루카의 엉덩이를 받치며 몸을 일으켰다. 남을 얼마 업어본 적 없는 본새였다. "이쪽입니다!" 스태프가 가리킨 방향으로 토라오가 뛰었다. 축 늘어진 하루카의 팔이 토라오의 어깨 위에서 덜렁거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토우마가 분한 투로 시근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상태가 심각했지? 앵콜 직전까지도 멀쩡했다. 아니면 열기에 취해 다들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하지만 오늘 하루카는 컨디션이 정말로 좋았다. 무대가 있는 날은 늘 그렇듯 기분도 절호조였다. 이전 경찰이 개입한 이래 장난전화도 뚝 그쳤다고 들었다. 덕분에 다크서클도 싹 걷혔을 터였다. 배탈? 그럴 리 없다. 점심은 전부 같은 메뉴의 도시락이었다.
미나미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고 순간 다리가 굳을 뻔했을 정도로 송연해졌다.
'관객의 함성에 예의 '부름'이 섞여있었나?'
토라오는 하루카를 업고도 기세 좋게 계단을 뛰쳐올라갔다. 몇 계단씩 깡충깡충 건너뛰는 충격에 정신이 들었는지 하루카가 가늘게 눈을 떴다. 하루카는 토라오의 등 위에서 흔들리면서 눈을 반쯤 떴다. 그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
"무슨 소리야!"
"이스미 씨, 무리하지 마세요."
쌕쌕대는 숨소리에 섞인 사죄에 토우마가 분통을 터뜨렸다. 진작 하루카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루카를 업고 달리느라 거친 숨을 뱉는 토라오도 표정을 굳혔다. 걱정시켜서? 무대에 지장을 줘서?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소리 따윌 했다간 엉덩일 걷어차드리겠어요.' 하루카는 순순히 입을 다무는 대신, 미나미와 눈을 맞추고 입을 달싹거렸다. 미나미는 필사적으로 하루카의 입술 모양을 읽었다.
'역시 대답하지 않는 건 무리였어.'
11
하루카가 병상에서 앓는 저녁 사이 장마가 그쳤다. 뉴스채널마다 금년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며 소란했다.
세 사람의 염려가 무색하게도 하루카는 그날 밤이 지나기 전 몸을 회복했다. 혹시 몰라 받은 검진 결과표에도 모든 항목에 '매우 좋음'이 부기되어 있었다. "이게 고등학생의 체력이란 거냐…?" 세 사람은 안도했으나 동시에 어이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의사는 피로가 누적된 몸살이라고 진단하면서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악화되고 회복된 몸상태를 설명해내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하루카는 입원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한낮에 퇴원하게 되었다. 토라오와 토우마는 스케줄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 관계자가 수속을 마무리하러 간 사이 미나미가 하루카와 단둘이 남았다. 미나미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하루카는 이미 사복 차림이었다.
"퇴원 축하드려요."
"응…. 고마워."
미나미로부터 과일바구니를 받아든 하루카가 멋쩍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링거를 맞고 푹 쉬어서인지 혈색이 어제보다도 좋아 보였다.
"료 씨는 별 말 없었어?"
"화환에 버금가는 꽃바구니를 들려 보내려기에, 사양하느라 진땀을 뺐죠."
"병원에 꽃바구니라니….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그러게 말예요. 아, 접수대에 사람이 많아서 수속은 시간이 걸릴 거라더군요."
"그래?"
하루카는 침대 가에, 미나미는 의자를 끌어다 걸터앉았다. 하루카는 과일 바구니에서 귤을 꺼내더니 까지는 않고 양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미나미가 애꿎은 귤은 그만 괴롭히라고 말할까 고민하던 즈음이었다.
"미나미. 전에 했던 얘기 말인데…."
하루카는 화두를 던져 놓고도 이을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적잖이 뜸을 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앵콜 중간중간에 무시무시한 말이 들렸어. 무대에서 내려오라거나, ……."
입을 다무는 하루카의 얼굴이 흐려졌다. 미나미는 하루카가 생략한 '무시무시한 말'을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은 그런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거센 헤이트 함성이 있었다면 진작에 스태프가 저지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회장에 물리적으로 외쳐진 목소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런 목소리인데도. 내 이름을 부르니까 힘껏 응답할 수밖에 없었어."
"이스미 씨…."
"미나미가 기껏 충고해 주었는데…."
하루카가 힘을 준 엄지 끝에서 귤이 툭 터졌다. 허공으로 즙이 튀어 하루카가 흠칫 놀랐다. 미나미가 말없이 그 손을 감쌌다. 희생된 귤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미나미는 단정하게 손질된 엄지손톱을 세워 귤을 반으로 갈랐다. 하루카는 미나미가 섬세한 손가락을 노랗게 물들이며 귤껍질을 벗기는 자태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자아."
미나미는 흰 속껍질도 깔끔하게 제거한 귤을 하루카의 손바닥 위에 돌려주었다.
"이스미 씨는 흰 부분 별로 안 좋아하죠?"
"어, 어떻게 알았어?"
"후후.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하루카는 제 손 위의 귤 두 덩이를 내려다보다가, 그 중 큰 쪽을 미나미에게 내밀었다. 미나미는 사양 않고 받아들어 한 쪽을 떼어 먹더니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카 씨는 말로 타인을 상처 입힐 줄 아는 분이죠."
하루카는 귤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당혹한 표정으로 미나미를 바라봤다. 갑자기 이런 적시라고? 그의 충고를 듣지 않아서 심술을 부리나? '그치만 분명 사과했잖아!?' 반면 미나미의 얼굴은 상대방에게 어떤 위해도 가할 의도가 없다는 듯 유순했다. 물론 평소 독설을 뱉을 때도 그러하기 때문에 하루카는 바짝 긴장한 채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입에 올리지 않아요. 잔혹한 악당을 자처하는데도 말이죠. 반면 어떤 사람은 언어가 아닌 것,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입밖으로 내기도 하거든요."
미나미는 그렇게 말하더니 귤을 마저 떼어 먹었다. 더 설명해줄 의향은 없어 보였다. 하루카는 매끈한 귤을 노려보며 골몰하다가 허리를 펴고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그 언령이라는 거 말야. 꽤 적당한 이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적당한 이론이라면…?"
미나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우리도 무대 위에서 곧잘 말하잖아. '따라와', '지켜봐', '소리 질러' 같은 것들. 그런 단말마에도 힘이 있는걸. 관객도 우리한테 대답한다구."
미나미는 물티슈를 뽑은 다음 시간을 들여 손을 닦았다. 하루카의 엉성한 논리를 지적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루카는 성가신 소리를 듣기 전에 선수를 쳤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말한 적이 있어. '관객과 동화되지 말라'고."
"……."
"난 줄곧 그 사람의 가르침대로 동요하지 않고 퍼포먼스를 펼치려 해왔어. 하지만…. ŹOOĻ의 무대에 서고, 미나미의 노래로 관객을 열광시키면서…. 깨달았어. 그 요구를 고고하게 무시하는 건, 함께 흥분하지 않는 건 반칙이라고."
그 순간 미나미는 번번이 '대답'하고 마는 하루카의 바보 같은 관성을 이해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하루카는 무심코 응답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를 향하는 말들에. 미나미는 미소지었다. '그 결과 몸져눕고 만대도 말이죠.' 하루카가 머쓱하게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미나미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려오라는군요."
수속이 끝난 모양이었다. 미나미가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하루카는 얼마 없는 짐 앞에서 밍기적대다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미나미의 노래에도 힘이 있어."
"…제 노래에요? 무슨 힘이죠?"
미나미가 하루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입매에는 기대와 긴장이 반씩 섞여 있었다. 언젠가 하루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속박'."
미나미는 작게 웃어버렸다. 온건한 하루키의 '행복해져라' 운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꽤 과격한 언령이네요."
"흥. 미나미는 그렇게 생겨선 은근히 과격파니까. '우리를 돌아봐'라고 외친 다음, 이쪽에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놓아주지 않아."
"어머. 과격파라뇨."
미나미가 입가에 손을 대고 웃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네요. 마치 목표물을 한입에 삼켜버리는 아나콘다 같아요."
하루카는 목덜미가 조금 서늘해졌다. 그렇게 말하는 미나미의 눈이 웃음기 없이 빛났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을 적으로 두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러나 곧 덩달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자신은 이런 녀석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으니까. 다른 녀석의 곡은 성에 차지도 않을 정도로….
"가자."
하루카는 미나미를 지나쳐 병실 문을 열었다. 복도 창문으로 장마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광이 쏟아졌다. 어제의 일은 악몽이었던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 하루카는 마음을 다졌다. 아가리를 쩍 벌린 악의에 삼켜지지는 않겠다고. 당장만 해도 자신의 곁에는 그 말들을 다 합한 것보다 커다란 입구멍을 숨긴 물뱀이 서 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미나미가 나란히 선 하루카를 흘긋 보고 말했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이스미 씨."
"뭐. 이것저것 가뿐해진 것 뿐이야."
"그런가요? 마침 저도예요. …어머."
"하루, 미나!"
"토우마? 토라오까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풍경은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든 토우마의 모습이었다. 몇 걸음 뒤에서는 토라오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토라오는 모자-선글라스-마스크 3단 변장으로도 숨길 수 없는 훤칠한 신장 덕에 로비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루카가 당황한 낯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물었다.
"스케줄은? 그 장바구니는 뭐야?"
"일찍 끝났어. 아, 이건 하루 너 먹일 고기."
"……?"
하루카가 의심스런 눈으로 토우마의 얼굴과 장바구니를 번갈아봤다. 토라오가 뒤에서 거들었다.
"하루카 너는 입이 너무 짧아. 나는 네 나이 때 혼자서 고기 7인분은 거뜬히 해치웠다고."
"그건 토라오가 무식하게 혈기 넘쳤던 거라고…. 그보다, 어디서 구워먹을 건데!?"
"어…. 하루네 집?"
"찬성이에요."
어이없어하는 하루카와 티격태격하느라 네 사람은 다소 소란스럽게 병원을 떴다. 하루카는 자신이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슬쩍 꼬집어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마치 조금 친하기라도 한 것처럼, 진짜 그룹 멤버이기라도 한 양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이, 어제의 악몽보다 더 꿈만 같았다. 각자 다른 목적을 위한 비상이었다. 그 끝에 추락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이 녀석들과 함께 떨어지는 지옥은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